친구를 사귀는 일은 나이가 들수록 힘들지만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새로 친구를 만나려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바쁜 일상 중에서 시간을 내기가 힘든 경우도 있고 그 과정이 자칫 귀찮아서 소홀해지다 보면 이제 친구 사귀기는 힘든 나이라고 공연히 애매하게 나이 탓을 하게 됩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항상 일상의 쳇바퀴에서 좀 더 바쁜척하며 멀리 사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전화 통화하며 그들만을 그리워하며 ‘너희와 만나며 살던 때가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좋은 친구들을 그림을 통해 만나며 같이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히 쌓여지고 있습니다.
친구를 사귀며 가지는 좋은 점은 그들이 가진 장점을 옆에서 보고 배우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음식 솜씨도 뛰어나고 음식 만드는 일도 쉽게 얘기하는 친구를 보며 용기를 얻고 있던 어느 날, 장 보던 중에 엉겁결에 세일하는 무를 한 상자를 사게 되었습니다. 점원은 낱개와 같은 값이니 사서, 쓰고 남은 무는 버리며 된다며 카트에 실어주었습니다. 그래도 음식 버리면 죄받는다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한민족의 후손인데, 남은 음식도 아닌 생무를 어떻게 버릴 수가— 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 집에서 맛있게 먹은 짠지와 깍두기 만드는 법을 대충 전수받은 후에 만들기에 도전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담그는 김치가 서툴렀지만 제법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가슴에 차올랐습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저 오늘 깍두기 담았어요!”
그림을 배우는 우리 학생들도 한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이런 뿌듯함을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붉은 고춧가루를 양념에 버무리며 그 빨간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정열의 색상인 빨간색을 바라보며 화가 천경자의 ‘볼티모어의 연인 1’이 떠올랐습니다.
화가 천경자는 일제의 식민지 시절인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예와 묵화에 능했던 어머니 밑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그림 공부를 위해 떠납니다. 일본의 동경여자 미술 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제 치하의 제22회 선전(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조부상’(1942), 제23회 ‘노부’(1943) 입선을 합니다. 귀국 후에는 교단에 계속 서다가 약 20년간의 홍대 교수직(1954년-1974년)을 끝으로 천경자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녀는 교수직을 그만둔 후에 아프리카, 남태평양, 유럽, 남아메리카 등지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때의 작품들은 그 여행지에서 느낀 선명한 색상대비, 강렬한 색감, 뚜렷한 윤곽선으로 이국적인 여성이나 풍물들을 담아내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종이와 묵이라는 매체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전통 동양화와는 전혀 다른 예술 정신이나 기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의 격동기를, 채색화는 왜색풍이라며 경시하던 시기를 확신에 찬 작가정신으로 맞서 이겨낸 화가 천경자는 한의 정서를 여성의 감수성으로 풀어내었으며, 여인, 꽃, 나비, 뱀 등이 어우러진 소재의 환상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함께 누린 뛰어난 역량을 지닌 여성 작가입니다.
조선시대 정종 시대의 영명위 홍현주 부인이 창안한 음식인 깍두기, 이름이 없어서 무를 깍둑 깍둑 썰어서 버무려 보아서 깍두기란 이름으로 그 후에 오첩 밥상(정식)에까지 오르게 된 깍두기—. 미술계에서 여성으로 작가로 입신하기 어려웠던 시절 일본 유학파 동양화가, 채색화는 왜색풍이라며 무조건 경시하던 해방 이후의 험난한 시절을 극복하여 한국 화단의 한 획을 그은 천경자의 삶이 깍두기와 오버랩되어 그 잔상이 하루 종일 뇌리에 남는 하루였습니다.
깍두기—, 친구—, 천경자—. 양념을 잘 조합해서 버무리는데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비법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요?
작품명: 천경자 ‘볼티모어에서 온 여인 1’, 종이에 채색 38×46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