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시카고 여행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블루맨 그룹을 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시카고를 보지 않은 것입니다” (If you haven’t seen Blue Man Group, you haven’t seen Chicago.)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는 그들의 명성에 눌려서 다른 쇼를 보고 싶었던 필자는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쇼의 진미는 전통적인 화려한 조명, 의상과 율동으로서 보는 즐거움을 줘야한다는 필자의 견해에 블루맨은 어느 조건도 충족하지 못했지만, 필자보고 진부하다는 아이들의 눈총과 함께 왕따를 면하기 위하여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미시건 강가를 따라 언뜻언뜻 보이는 눈이 있는 거리의 정경은 시카고의 건물이 더욱 고층이지만 서울의 한강 주변과 많이 흡사하였습니다. ‘하물며 거리도 비슷한데 아이들 취향은 왜 이리 다른거야?’하는 쓸데없는 억지를 부리며 입장한 극장안의 정경도 역시 지극히 현대적으로(contemporary)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이 블루맨과 같이 작업할 때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했다는 안내문과 함께 그의 작품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잭슨 폴락은 1912년 서부의 와이오밍주 출신으로 1930년에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업합니다. 이 시기의 그는 광활한 미국 서부를 소재로 물감을 두껍게 채색한 다소 예외적인 화풍을 보입니다. 2차 대전 중에 뉴욕에 망명 중인 초현실주의자들과 만나 인간 정신의 자동 기술법에 매료되며, 구스타프 융의 정신 분석법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1945년 롱아일랜드로 이주한 폴락은 헛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의 유명한 뿌리기 기법을 시작합니다. 그는 붓으로 그리는 대신에 뿌리고 던지고, 튕기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작품의 사이즈는 주로 한 벽면을 차지할 정도의 초 대형 사이즈입니다.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그 주변이나 위를 걸어다니며 뿌린 물감으로 인한 독창적인 화면을 창출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그의 움직임에서 나온 결과로 신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하여 비평가 헤롤드 로젠 버그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경부터 음주와 신경쇠약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심리 치료를 받았던 그는, 1956년 술을 마신뒤 과속으로 운전하다 차량 전복사고로 생을 마칩니다. 새로운 추상 회화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폴락은 또한 과정을 중시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길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잭슨 폴락과 같이 작업도 했었다는 말이 솔깃하며 극장으로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쇼는 시작되었습니다. 양쪽에 자막이 나오는 스크린을 관중들에게 읽고 따라서 말하게 하며, 관중들과 호흡을 맞추며 블루맨들이 등장하였습니다. 현란한 드럼 솜씨가 일품으로, 파란색으로 변장한 그들과 드럼에서 튀어나오는 컬러풀한 색상도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객석을 걸어다니며 그 중에서 관객을 뽑아서 같이 무대에서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음, 역시 이 쇼는 내 취향이 아니야—’ 하는 동안에 어느덧 쇼는 종반을 치닫고 있었습니다. 블루맨들이 객석 뒤로 올라가서,객석 뒷면 전체를 장식한 화장지 롤을 계속 풀어대었으며 관객들은 그들과 함께 그 풀린 휴지를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하며 무대 앞까지 전달하며 그들의 퍼포먼스에 동참하는 것이 클라이막스 였습니다.
그 휴지를 앞 관객에게 전하지 않으면 휴지에 파묻히게 되니 어쩔수없이 동참하며 ‘에구, 팔아파!’하며 불평하며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음악 속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순간이였습니다. 온 관객이 일심동체가 된 느낌과 함께, 마음 안에 있는 막혀있던 문이 열리는 듯한 카타르시스같은 전율이 온 몸에 흐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찰나, 그 안에서 한 없이 웃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한 없이 짜증나서 휴지에 파묻힌 노부부의 모습이 각인되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이런 느낌을 이 퍼포먼스는 주고자하는 의도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필자가 정말 구닥다리 장농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재미있었다는 조카와 딸들의 말에 떨떠름하게 ‘나도야’ 대답하며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상념이 젖었습니다. 어정쩡한 대답만큼 필자의 위치가 정말 어정쩡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기성 세대의 고정 관념에 물들어서 익숙치 않은 신세대 개념(Concept)은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자아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지금부터 신세대들의 생각을 부지런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휴지에 파묻힌 노인들처럼 그들에게는 단지 고집붙통으로 비쳐지지는 않을까하는 위기 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잭슨 폴락의 ‘연보라빛 안개’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파격적인 표현 수단의 예술 행위보다는 미술의 아름다운 미의 뜻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예술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신세대에게 구세대로 비쳐지는 것은 싫지만 개인적인 예술적인 취향이여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항변하려고 합니다. 미술을 배우는 학도들의 자세는 파격적인 멋으로 치중한 것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지론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열린 마음에 소신있는 자세—, 왠지 기성 세대로서의 품위 유지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품명: Jackson Pollock, ‘Lavender Mist’, 1950